“설정하신 시각까지, 3분, 남았습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디지털시계도 패널에 큼직하게 띄워놓았죠. 왼손은 터치패널 앞, 오른손은 생체 인식 시스템 앞. 이제 곧 혈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3, 2, 1, 예매 오픈.
나는 재빠르게 탑승 날짜와 객실을 선택하고 생체 인증을 시도했습니다.
[에러 : 이미 선택된 객실입니다]
나는 침착하게 원래의 화면으로 돌아와 많이 줄어든 빈 객실 중 하나를 터치했죠.
그리고 생체 인증 시도!
[에러 : 이미 선택된 객실입니다]
역시 아네모이아호의 인기는 대단하군요. A.I.를 이용한 부정 예매를 막기 위해 번번이 생체 인증을 해야 하는 이 귀찮은 시스템까지 도입됐다죠? 나는 다시 한번 탑승 날짜와 객실을 선택하고 생체 인증을 시도했습니다. 로딩 중….
[확인 : 백설아 고객님, 아네모이아호 999열차 13-6호 (2인) 예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사실 나는 이 열차에 대해 잘 모릅니다. ‘향수, 혹은 환상-차세대 버추얼 윈도우로 즐기는 지구의 향취’라는 광고 문구 외에 별다른 설명도 없거든요. 애초에 ‘지구의 향취’라는 표현부터가 낯설다고나 할까요?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부모님 세대부터만 해도 지구에서 살아본 사람이 극히 드물거든요. 당연히 나도 포함해서요.
그런 내가 아네모이아호 티켓팅에 도전한 이유는 올해로 139세를 맞이하신 우리 외증조할머니를 위해서입니다. 요즘 우리 외증조할머니는 정신이 온전치 않으세요. 인공 태양이나 우주 거주지의 형태에 놀라 벌벌 떠시는 일도 부지기수였죠. 그럴 때마다 외증조할머니는 당신이 아직도 지구 거주인이라고 착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우주 거주지에서 벌써 70년을 넘게 사셨는데도요.
* * *
아네모이아호 999열차 13-6호 객실은 딱 두 사람이 마주 앉을 정도의 크기였어요. 도대체 이 작은 열차에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이유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죠. 그때, 건너편에 앉아 계시던 외증조할머니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이렇게 물으셨어요.
“거기 예쁜 언니, 언니도 춘천 살아요? 난 춘천 사는데.”
갑자기 또 나를 못 알아보시는군요. 당황한 내가 재빨리 대답하지 못하자 외증조할머니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셨어요.
“이거 춘천 가는 기차 아니에요? 잘못 탔나?”
“아, 맞아요! 나도 춘천, 거기 가요!”
외증조할머니는 그제야 안도하듯 활짝 웃으셨습니다. 마침 객실 스피커에서 녹음된 기적 소리와 맑은 플루트 선율이 흘러나오더군요. 그리고 안내 방송이 이어졌습니다.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13시 6분에 청량리역을 출발하여 남춘천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특별 가상 열차입니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방송과 동시에 창문을 덮고 있던 커튼이 스르르 양쪽으로 걷혔습니다. 박물관에서 홀로그램으로나 보았던 20세기형 기차역 플랫폼의 모습이 나타났죠.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 기둥에 엮여 길게 이어진 고압 전선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데도 정말 실물 같았어요.
내가 가장 시선을 빼앗겼던 것은 길게 이어진 산등성이에 맞닿은 하늘의 모습이었습니다. 통조림통처럼 생긴 우주 거주지에서는 고개를 치켜들면 반대편에 거꾸로 붙어 있는 집들의 지붕이 보이죠. 그런데 버추얼 윈도우를 통해 올려다본 아네모이아호의 위쪽 공간에는 드높은 창공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감각 체험을 위하여 각 객실 창문 개방이 진행될 예정입니다. 개방을 원치 않으시거나 계절 변경을 원하시는 손님께서는 창문 아래 활성화된 버튼을….”
서비스로 제공된 삶은 달걀을 까서 외증조할머니 손에 쥐여드린 무렵이었습니다. 객실 창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싸늘한 바람과 함께 새하얀 가루가 날아들었어요. 나는 손등에 떨어진 다각형의 새하얀 결정이 녹아내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수업 자료에서나 보았던 눈이라는 기상 현상이었죠. 나는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습니다. 차가운 결정들이 설탕처럼 손바닥에 내려앉았다가 스르르 자취를 감췄습니다.
“까치가 다 있네? 귀한 손님이 오셨나?”
흑백의 몸통에 은은한 푸른빛 날개깃을 펄럭이는 조류 한 마리가 객실 창밖을 선회하다가 깍깍 울며 사라졌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는 눈 속을 거니는 동물들의 모습을 간간이 보았죠. 외증조할머니는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셨지만, 지구에서 익히 보았던 동식물의 이름은 전부 기억하고 계셨어요. 창밖을 바라보는 그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평온해 보이셨고요.
* * *
“설정하신 시각까지, 3분, 남았습니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디지털시계도 패널에 큼직하게 띄워놓았죠. 왼손은 터치패널 앞, 오른손은 생체 인식 시스템 앞. 외증조할머니는 더 이상 곁에 안 계시지만, 나는 아네모이아호 예매 전쟁에 다시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곧 혈투가 벌어질 것입니다. 3, 2, 1, 예매 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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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네모이아(anemoia) : 경험해보지 않았던 시대에 대한 향수
※ 남춘천행 무궁화호 열차는 2010년 운행을 종료함
민이안 작가

2022년 한국과학기술출판협회가 주관한 제1회 공상과학소설 공모전에서 《눈을 뜬 곳은 무덤이었다》로 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과학 지식을 문학적으로 매끄럽게 녹여내 심사위원으로부터 “행간마다 완독의 덫을 설치” 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SF 소설계에서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는 작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