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향 정홍래의 욱일취도(旭日鷲圖)
한 해가 새롭게 밝았다. 이런 세시(歲時)에 옛사람들은 기복(祈福)과 벽사(辟邪)의 의미로 대문에는 문배(門排)를 붙이고 임금과 신하들 간에는 그림을 주고받는 풍습이 있었다. 이때 주고받던 그림을 세화(歲畵)라 일컬었다. 조선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이나 개인 문집 등에 세화에 관한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며 중·후기에 많이 통용되었다. 여기서는 조선의 수많은 세화 중 예술성이 가장 빼어나고 매 그림에 일가를 이룬 만향 정홍래(晩香 鄭弘來, 1720~미상)의 [욱일취도(旭日鷲圖)]를 살펴보면서 갑진년 새해 벽두에 상서로운 기운이 온 천하에 가득하기를 기원해 본다.
도화서 화원을 천직으로 산 삶
만향 또는 국오(菊塢)란 아호를 썼던 정홍래는 도화서 화원이었다. 화원의 주요 임무는 어진 제작과 궁중행사에 따르는 의궤 제작,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한 교민화와 직물을 짜는 경직도, 불화(佛畵) 제작, 연말연시에 그리는 세화 제작 등이었다. 고된 업무에 비해 대우는 매우 열악했지만, 기량이 군신들에게 알려지면 승급 등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만향이 언제 도화서 화원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종6품의 주부(注簿)와 내시교수(內侍敎授) 중림찰방(重林察訪) 등을 지냈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한창 젊음을 꽃피울 26세 때(1745년) 만향은 기로소의 계첩인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제작에 참여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국가원로 우대기관이었다. 29세 때인 1748년에는 영조의 명으로 [숙종영정모사도감의궤(肅宗影幀模寫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했다. 이때의 주관화사는 장경주이고 만향, 장득만, 김희성이 동참화사의 영예를 얻었다. 같은 해에 영조어진과 세자 초상 제작에도 동참화사로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만향에게는 동반직(東班職)을 제수하는 영조실록(영조 24년 2월)의 기사가 나온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는 임금이 비운으로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이를 봉원(封園)하는 과정을 그린 [장조상시봉원도감의궤(莊祖上諡封園都監儀軌)]에 참여했다. 이때는 만향의 나이 57세로 노년의 연륜이 한참 농익어 갈 무렵이었다.
도화서 화원으로서 한창 젊음을 꽃피울 26세 때(1745년) 만향은 기로소의 계첩인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 제작에 참여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70세 이상의 관료들이 들어갈 수 있는 국가원로 우대기관이었다. 29세 때인 1748년에는 영조의 명으로 [숙종영정모사도감의궤(肅宗影幀模寫都監儀軌)] 제작에 참여했다. 이때의 주관화사는 장경주이고 만향, 장득만, 김희성이 동참화사의 영예를 얻었다. 같은 해에 영조어진과 세자 초상 제작에도 동참화사로 참여했으며, 이러한 공로로 만향에게는 동반직(東班職)을 제수하는 영조실록(영조 24년 2월)의 기사가 나온다.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는 임금이 비운으로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莊獻)으로 추존하고 이를 봉원(封園)하는 과정을 그린 [장조상시봉원도감의궤(莊祖上諡封園都監儀軌)]에 참여했다. 이때는 만향의 나이 57세로 노년의 연륜이 한참 농익어 갈 무렵이었다.
정교·웅장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묘사
푸른 파도 위에 붉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그 아래 구름은 궁궐 정전에서 쓰던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의 다섯 봉우리와 같이 정형화된 모습으로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여명의 때, 잿빛 구름 아래 사나운 파도가 너울대고 바위에 부딪힌 물결은 하얀 포말을 사방으로 날린다.
웅장한 자태의 매 한 마리가 바위 위에 떡하니 앉아 있다.
날카로운 부리가 돋보이며 당당한 자태는 차라리 우아해 보이기도 한다. 노란색의 둥근 눈과 아래로 낚싯바늘 같이 굽은 검은 부리, 세모꼴의 머리를 왼쪽으로 들어 마치태양을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 범상치 않다. 촘촘히 그리고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회갈색의 깃과 노란 점박이, 회색의 꼬리 깃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흰털이 덮인 배 아래로 쭉 뻗은 강인한 다리와 예리하기 그지없는 발톱이 단단히 바위를 붙잡고 있다.
바다의 우뚝 솟은 바위는 청록의 짙은 채색과 표면에 검은 태점을 강하게 찍어 특이한 형상을 보인다. 굵은 먹선으로 넘실대는 높은 파도를 그리고 그 속에 세필로 가느다란 선을 촘촘히 넣어 파도의 동세를 치밀하게 표현했다.
이렇듯 만향의 매 그림은 정교한 필치에다 화려한 채색을 사용함으로써 궁중장식회화의 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빼어난 묘사력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조선 후기의 수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반의 그림과 달리 이 그림에는 화제(畵題)와 낙관(落款)이 없다. 단지 그림의 양식 등을 보아 세화로 추정할 따름이다.
웅장한 자태의 매 한 마리가 바위 위에 떡하니 앉아 있다.
날카로운 부리가 돋보이며 당당한 자태는 차라리 우아해 보이기도 한다. 노란색의 둥근 눈과 아래로 낚싯바늘 같이 굽은 검은 부리, 세모꼴의 머리를 왼쪽으로 들어 마치태양을 노려보는 듯한 모습이 범상치 않다. 촘촘히 그리고 매우 섬세하게 표현한 회갈색의 깃과 노란 점박이, 회색의 꼬리 깃은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흰털이 덮인 배 아래로 쭉 뻗은 강인한 다리와 예리하기 그지없는 발톱이 단단히 바위를 붙잡고 있다.
바다의 우뚝 솟은 바위는 청록의 짙은 채색과 표면에 검은 태점을 강하게 찍어 특이한 형상을 보인다. 굵은 먹선으로 넘실대는 높은 파도를 그리고 그 속에 세필로 가느다란 선을 촘촘히 넣어 파도의 동세를 치밀하게 표현했다.
이렇듯 만향의 매 그림은 정교한 필치에다 화려한 채색을 사용함으로써 궁중장식회화의 한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빼어난 묘사력으로 생동감이 넘치는 조선 후기의 수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일반의 그림과 달리 이 그림에는 화제(畵題)와 낙관(落款)이 없다. 단지 그림의 양식 등을 보아 세화로 추정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