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이번에는 내 동행을 소개할게요.
여기, 5번 객실 29번 티켓을 가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주근깨 소녀의 이름은 사빈. 목적지는 이 열차의 종착역인 타베얀. 작은 바다 마을이죠. 사빈이 수도인 에소에 오기 전까지 열아홉 해를 살아온 곳이기도 해요. 오늘은 할머니의 아흔세 번째 생신을 축하하러 가는 길이고요.
햇살 좋은 따스한 날, 기차의 다정한 흔들림과 내가 드리워준 적당한 그늘 속에서는 잠에 빠지지 않기가 더 어려울 거예요. 물론 사빈이 지난밤 오디션 합격 소식을 듣고 들떠 잠을 설친 까닭도 있지만요. 나는 당연히 사빈이 그 역할을 따낼 줄 알아서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오디션장 문을 열 때부터 알았다니까요. 정말이에요.
우리 모자는 동행의 눈높이보다 아주 약간 위에 있을 뿐인데도 꽤 많은 것들을 살피고 알아채지 않겠어요. 베레모, 당신도 벌써 알겠지만요.
나를 상점에서 구매한 첫 번째 동행과는 그 당일에 작별해야 했어요. 양손에 가득 든 짐을 신경 쓰느라 내가 거리에 떨어지는 줄도 몰랐거든요. 두 번째 동행은 그런 나를 발견한 수다쟁이 노인이었는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잔뜩 들을 수 있어서 오래 함께하고 싶었지만, 강풍에 멀리 날아간 나를 결국 붙잡지 못했어요. 세 번째 동행은 지방 출장이 많은 영업사원으로 우연히 집 앞 나무에 걸린 나를 발견하고 뭔가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느 날 중요한 고객의 전화에 몰두하느라 나를 기차 옷걸이에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잊고 하차해버렸죠. 옆자리 승객의 “모자 잊으셨어요.”라는 말도 못 듣고 말이에요.
네, 그게 사빈이었어요. 바로 나의 네 번째 동행이요.
솔직히 처음엔 사빈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옷걸이에 있던 나를 꺼내서는 한참 가만히 보더니, 듣는 사람도 없는데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늘어놓지 않겠어요? 나를 왼손에 들고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가면서요. 가만히 듣다가 나중에야 알았죠. 단순한 혼잣말이 아니라 연극의 대사라는 것을요. 그날 사빈은 오디션을 위해 에소로 가던 길이었고, 연습을 위한 소품으로 나를 잠시 빌린 것이었어요.
에소에 내려 사빈은 유실물센터로 향했어요. 사빈의 목소리가 꽤 듣기 좋아서 내심 나를 그대로 데려가 주길 바랐는데, 유명 브랜드도 아닌 누군가 쓰던 낡고 수수한 올리브색의 클로슈가 그리 탐낼 만한 물건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오디션의 건투를 빌며 유실물센터에서 작별해야 했지요.
그 후 유실물센터에서 여섯 달을 보냈고, 세 번째 동행은 나를 찾으러 오지 않았어요. 고작 모자 하나를 찾기 위해 이곳까지 오기에 그의 삶은 지나치게 분주했거든요. 아아, 끔찍했어요. 선반에 가만히 놓인 채로 꼼짝 못 하는 모자의 삶을 당신은 상상할 수 있나요? 햇빛을 못 보는 모자, 거울 앞에서 뽐낼 수 없는 모자, 여행하지 못하는 모자라니!
그뿐이 아니에요. 유실물은 여섯 달 안에 찾아가지 않으면 나 같은 품목은 폐기라고 하더군요. 네, 사형선고였어요.
그때 사빈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방치된 유실물은 습득한 사람이 원하면 소유할 수 있는데, 사빈이 나를 데려가고 싶다고 했다는 거예요. 그 순간, 스포트라이트 하나 없이도 사빈은 얼마나 별처럼 반짝거리던지. 당신은 짐작도 못 할 거예요.
쌓인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고서, 사빈은 내가 그 푹신한 머리카락을 감싸 안을 수 있도록 기꺼이 허락해 주었습니다. 사빈의 하숙집으로 가는 길 여우비가 내리는 바람에 몸이 축축해지고 말았는데도 나는 기뻤어요. 모자 덕분에 얼굴이 빗물에 안 젖었다며 사빈이 콧노래를 흥얼거렸기 때문이에요.
집에 도착한 사빈은 나를 구석구석 깨끗이 닦으며 말했습니다. ‘넌 행운의 모자야.’라고요. 나를 유실물센터로 보냈던 그날, 난생처음 오디션에 합격해 드디어 작은 단역을 얻게 되었다고 했어요. 그간의 불합격을 모두 잊을 만큼 행복한 날이었다고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섯 달 후 아침 유실물센터의 연락을 받았을 때,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를 데려가기로 했다고 해요.
그 후로 나는 사빈이 오디션을 보러 갈 때마다 늘 동행했고, 대사를 연습할 때는 임시 상대역이나 소품이 되어주었습니다. 불합격 소식을 듣는 날엔 흐르는 눈물을 나의 챙 아래 그늘에 숨겨주기도 했고요.
누구보다 사빈의 많은 표정을 알게 된, 가장 가까운 관객으로 곁을 지키며 두 해가 지났을 때 나의 별처럼 반짝이는 동행에게 드디어 주인공 역할의 합격 소식이 전해졌어요.
맞아요. 그게 바로 꼬박 새운 것이나 다름없는 어젯밤이었으니 지금 달콤한 잠에 깊이 빠져있을 만하지요.
오, 이제 종착역 안내 방송이 나오네요. 곧 타베얀이에요. 오늘 타베얀의 날씨는 파랗게 맑고 태양은 눈부시군요. 기차에서 내려 사빈의 고향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먼 파도 소리를 들으며 기분 좋은 일광욕을 할 수 있겠어요.
베레모 당신도 5번 객실 30번 티켓을 가진 당신의 동행과 함께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랄게요. 안녕.
연여름 작가

한예종 영화과에서 연출과 시나리오를 공부했다. 기억과 변화, 떠남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SF 앤솔러지 《나와 밍들의 세계》에 단편 〈시금치 소테〉로 참여했으며, 2021 SF어워드에서 〈리시안셔스〉로 중단편 우수상을, 〈복도에서 기다릴 테니까〉로 제8회 한낙원과학소설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