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 SPECIAL

PLACE

카세트테이프 공장에서 문화예술 체험 허브로

팔복예술공장

오래된 공단을 가로지르는 예술 문화 체험 공간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미로 같은 그 길 따라
공단의 아름답고 고단한 역사를 보듬으며 내 마음속 상처도 함께 어루만졌다.

writer. 임지영 sources. 팔복예술공장

오래된 공단을 가로지르는 예술 문화 체험 공간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미로 같은 그 길 따라
공단의 아름답고 고단한 역사를 보듬으며 내 마음속 상처도 함께 어루만졌다.

writer. 임지영 sources. 팔복예술공장

문화 재생으로 새 심장을 단

오래된 공장

전주 팔복예술공장에 들어서면 알록달록한 색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지 전체에 색의 향연이펼쳐진다. 검붉은 물탱크에는 ‘팔복예술공장’이라 선명하게 쓰여 있다. 처음 본 ‘첫마중길’이 즐겁다. 물탱크 너머로 옛 고장의 이름 ‘쏘렉스’가 적혀 있는 기둥이 겹친다. 현재와 과거가 겹치는 묘한 장면을 조우할 수 있다.
이곳은 원래 카세트테이프를 만들던 공장이었다. 1979년 ‘썬전자’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공장은 한때 5백여 명의 노동자가 일하며 호황을 누렸다. 음악이 지금처럼 음원이 아닌 카세트테이프로 존재했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말 CD가 나오면서 공장은 위기를 맞았다. 회사는 1987년 노조와 임금 협상 과정에서 공장을 폐쇄했고, 노동자들은 400일 넘게 파업으로 맞섰다. 썬전자는 이때 ‘쏘렉스’ 로 이름을 바꿨고, 1만 4000㎡ 공장 터에 2층짜리 건물 2동만 남긴 채 1991년 가동을 멈췄다. 새로운 주인을 찾지 못한 공장은 이후 25년간 방치되었고 3만 명이었던 팔복동 주민은 8천 명으로 줄었다. 팔복공단 쏘렉스가 복합문화공간으로 새 생명을 찾은 건 2016년이다. 그 해 문화체육관광부 문화 재생사업에 선정되어 5년의 기간을 거쳐 ‘팔복예술공장’으로 변신했다. 부수지도, 새로 짓지도 않았다. 위험한 구조체만 철거, 보강하고 벽체, 기둥, 계단 등은 그대로 두었다. 그 속에 작품들을 설치하고 다양한 색과 유리, 천 같은 재료들로 생기를 주었다. 공간이 필요한 곳에는 컨테이너를 활용했다. 전주 하면 떠오르는 한옥마을과는 사뭇 다른 현대적인 공간으로 꾸몄다. 그렇게 화려하게 부활한 팔복예술공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전주의 새로운 명소로 각인되고 있다.

역사, 체험, 지역 모두 포용한

놀이터이자 쉼터

공간은 크게 A동과 B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서부터 무한 상상의 예술 놀이터가 펼쳐진다. A동은 1층 카페와 2층 전시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고, 로비에는 건물의 역사가 담겨 있다. 문을 닫을 당시 이곳에 쌓여 있었던 먼지와 낙엽들, 남아있던 카세트테이프들, 누렇게 바랜 출근부와 생산일지, 격렬했던 파업 현장이 담긴 노동자 소식지 ‘햇살’ 까지 세월의 흔적을 담은 다양한 볼거리를 만날 수 있다. 로비 옆 카페 ‘써니’는 마치 동화책 속으로 걸어온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해주는 공간이다. 지붕 함석판은 벽이 됐고 전등은 공원들이 일하던 의자를 분해해 재조립했다. 테이블은 공장 철문을 떼어내 재가공해 만들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팔복동 주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면 모던한 전시 공간이 펼쳐진다. 국내 작가의 그림 전시는 물론, 해외 작가의 이색 설치미술과 영상 작품도 만나볼 수 있다. 각 전시 주제와 연계한 포토존도 마련되어 있어 즐거움을 더해준다. 전시를 둘러보고 출구로 향하는 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특별한 ‘화장실’이 등장한다. 예전에 공원들이 실제 사용했던 화장실로, 지금은 예술 공장이 지나온 길을 보여주는 전시물로 보존되어 있다. A동과 B동은 컨테이너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B동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인 ‘꿈꾸는 예술터’와 ‘이팝나무 그림책 도서관’, 식당인 ‘써니부엌’이 있다. 벽면은 온통 아이들 낙서다. 예술터에는 아이들이 만들다 간 찰흙 작품과 그림들이 ‘개구지게’ 장식되어 있다. 곳곳이 창작소이고 놀이터이며 ‘포토포인트’이자 쉼터다. ‘놀면서 배운다’는 철학이 스민 공간이다.

비움과 채움이 지속해 구동하는

예술 플랫폼

팔복예술공장은 인천아트플랫폼의 총괄 기획자였던 건축가 황순우가 기획, 설계했다. 이곳이 ‘플랫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드웨어에 집중한 물리적 재생이 아니라 비움과 채움이 지속적으로 구동하는 공간을 그렸다. 그의 꿈처럼 지금 팔복예술공장은 아이들의 놀이터로, 작가들의 전시장이자 작업장으로, 다양한 방문객들의 문화 체험 공간이자 힐링 공간으로 기능한다.
이 공간은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도시경관 분야의최고 국제상인 ‘2019 아시아 도시 경관상’을 수상했는가 하면 국제슬로시티연맹의 ‘2019 국제슬로시티 어워드’에서 최고상인 ‘오렌지 달팽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15회 대한민국 지방자치 경연대전에서도 공공디자인 분야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장관상을 받았다.
팔복예술공장 옆에는 공단과 궤를 함께하는 철도가 뻗어 있다. 한때 팔복동 전주 제1일반산업단지에서 생산한 제품이 북전주역을 거쳐 분주히 퍼져 나간 길이다. 철도 주변에 이팝나무가 늘어서 봄이면 꽃놀이하러 오는 이가 많다. 가을에는 울긋불긋 단풍 옷으로 갈아입은 가로수들이 하얀 꽃망울을 대신한다. 인생 사진이나 찍자고 안내판의 ‘경고’ 문구를 무시하고 무작정 철도에 들어서면 곤란하다. 폐철도가 아닌, 하루에 두세 차례 화물차가 지나가는 ‘살아있는 철도’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감각기관을 흔드는 기차 소리 대신 잔잔한 바람 소리를 듣는다. 반 고흐는 ‘예술은 삶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가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찰나, 우연히 팔복예술공장이라는 이름을 새긴 굴뚝 너머 푸른 하늘 위로 흘러가는 분홍빛 새털구름을 본다. 옛 공장이 꾼 꿈은 이런 풍경이었을까. 팔복예술공장과 주변은 그 자체로 수많은 상처와 흔적을 품고 있지만, 그 아픔을 예술로 어루만진 뒤 새롭게 태어났다. 관람료는 무료고, 공간은 누구에게나 두 팔을 활짝 벌려 안아 준다. 이만한 환대가, 힐링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