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하나 된 선비,
그 물아일체의 풍광

인재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

15세기 초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서 보듯 장대한 화면을 배경으로 하는 절파(浙派) 화풍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 인재 강희안(仁齋 姜希顔, 1417~1464)은 작은 경치를 즐겨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안로(金安老)가 쓴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는 “인재는 글씨, 그림, 시를 잘하여 당시에 삼절(三絶)이라고 일컬었다. 묵화(墨畵)로 소품 그리기를 좋아하여 벌레, 새, 풀, 나무, 인물, 물건을 그렸다. 필치는 세밀하지 않으나 그림은 생기가 있고 그 무르익은 모양이 화가 본색에는 미치지 못하나 시인의 남은 운치로 한 것이니, 마땅히 화사(畵史)의 격조(格調) 외에 있을 것이다.”고 상찬하고 있다. 여기서는 인재 강희안의 작품 중 그의 품성과 학덕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를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살펴보면서 일찍 찾아온 염하(炎夏)의 더위를 식혀보고자 한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순탄한 관직 생활과 서화의 명성

인재는 어릴 때부터 타고난 재주가 남달랐다. 조금 자라서는 담장과 담벼락에 손 가는 대로 붓을 휘둘렀는데 그림과 글씨가 모두 법에 맞았다고 하니 그림과 글씨에 대한 그의 재주는 타고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인재 나이 22세 때는 시부진사시(詩賦進士試)에 급제하고, 3년 후에 열린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로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나아감으로써 중앙관직에 첫발을 디디게 되었다. 이후 돈녕부주부 등을 거쳐 38세 때 집현전 직제학에 오르는 등 비교적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 이를 일반에 보급하기 위해 정음의 해례본을 편찬했다. 이때 인재는 정인지 등과 함께 정음 28자에 대한 상세한 주석 작업에 참여했으며 최항, 박팽년, 신숙주 등과는 <용비어천가> 주석을,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등과는 동국정운 주석 작업에 참여하는 등 한글의 보급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이때가 인재 나이 27세에서 31세 무렵이었다.
계유정난으로 실권을 쥔 세조는 안평대군의 필치로 주조된 금속활자 임신자(壬申字)를 1453년 새로이 주조토록 하면서 인재에게 이 활자의 글씨를 쓰도록 명하였으니, 이것이 을해자(乙亥字)이다.
순탄했던 인재의 관직 생활에도 목숨이 풍전등화에 달하는 위기가 찾아왔다. 단종 복위운동이 물거품이 되자 이에 연루된 숱한 관료가 목숨을 잃으며, 인재 또한 이로 인한 심문을 받은 것. 성삼문의 적극적인 변호로 위기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는데, 이때가 인재 나이 40세였다. 후일 또다시 이 일이 거론되는 어려운 처지에 놓였지만, 이때는 세조의 비호가 있어 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인재 나이 44세 무렵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로 처음 부임하였지만 모친의 병환으로 얼마 되지 않아 돌아왔다.

세상사를 다 잊은 선비와 자연이 어우러진 수묵

깎아지른 절벽과 너른 바위가 화면을 압도하며 이에 걸맞은 여유로운 풍채를 가진 선비가 한가롭게 바위 위에 엎드려 있다. 아주 시원스레 뻗은 넝쿨이 화폭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갈대 비슷한 수초가 수면의 단조로움을 깨뜨리고 있다.
선비의 얼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넓은 미간과 낮은 코에 다 벗겨진 이마 등으로 인해 다소 희화화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자함이 만면에 배어나며 양손을 감춘 도포 자락에 얼굴을 지그시 얹고 온몸을 바위에 편안히 기댄 모습에서는 여유로움과 근엄함이 절로 묻어난다.
농묵으로 처리한 절벽과 바위는 붓을 가로 뉘어 쭉쭉 그은 준찰(皴擦)법을 활용한 반면, 담묵으로 처리한 넝쿨과 갈대는 일필휘지의 아주 빠른 붓질로 서예적 기법을 거리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또한 선화(禪畵)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의습선(衣褶線)의 단순 담박한 처리 등을 볼 때 인재가 그림과 글씨 재주를 함께 가진 당대 최고의 선비화가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렇듯 인재의 <고사관수도>는 가로 15.7㎝, 세로 23.4㎝에 불과한 매우 작은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세밀한 기교가 거의 드러나지 않아 다소 성긴 듯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쳐나고 자연의 경물과 인물이 하나 된 걸작이다.

재주를 내세우지 않은 짧은 생애

인재는 그림이 ‘천지 만물의 이치를 깨닫는 도구’라 여길 정도로 그림을 사랑하고 즐겨 그렸지만 남에게 내세울 일은 아니라 여겼기에 지금도 그의 작품은 전하는 것이 매우 드물다.
인재는 중추원부사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등창으로 인해 갑작스레 운명했다. 향년 48세였으며 그를 아끼던 세조는 관곽(棺槨)을 부의(賻儀)했다. 세조실록의 인재 졸기(卒記)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세상에는 한 가지 재예(才藝)만 있는 사람도 또한 스스로 자기를 나타내어 값을 구(求)하는데, 강희안은 재주가 많았으나 어리석은 것처럼 몸을 지키니 또한 어질다 아니하겠는가.”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의 푸른 강물은 오늘도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인재 강희안, 시문과 서화에 빼어났던 그의 삶은 꽃과 강물이 어우러지는 이상향을 꿈꾸었다. 아득한 세월이 흐른 지금이지만 인재는 그의 그림 속 선비가 되어 지리산 어느 계곡을 소요(逍遙)하고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