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의 <목멱조돈도>, 간송미술관소장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목멱조돈도>, 간송미술관소장

조선 후기인 17세기에 접어들자 시인, 화가 등의 예술인들이 중국풍을 흉내내는 대신 우리네 산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서 느낀 감흥을 사실대로 노래하고 그리는 진경시대(眞景時代)를 열었다. 이는 숙종 연간에 시작하여 영조, 정조 대에 최고조에 달하였으며 문학에서는 진경시문(眞景詩文), 글씨에서는 동국진체(東國眞體), 그림에서는 진경산수(眞景山水)로 펼쳐졌다. 그림에서 진경산수로 일컫는 화풍은 겸재 정선(謙齋 鄭敾)과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의 화성(畵聖)으로 일컬어지는 겸재는 진경시대 최고의 화가로 손꼽을 수 있다. 우리네 일상에서 매일 대하는 서울의 남산이 겸재의 붓끝에서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그의 노년 작품인 <목멱조돈도(木覓朝暾圖)>를 살펴보며 새해 벽두의 상서로운 기운이 천지에 충만하기를 기구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주변의 산하에 눈을 돌리다

어린 시절 겸재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도 여느 사대부가의 자제와 다를 바 없이 안동(장동) 김씨 6형제로 유명한 삼연 김창흡(三淵 金昌翕)의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익히는 등 유학에 전념했다. 14세 나이로 부친을 여의던 해, 남인이 정치 일선의 권력을 장악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이 발생하자 스승 김창흡도 영평(지금의 강원도 화천) 백운산 아래로 낙향하였다. 겸재 나이 19세 때 서인이 복권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을 지나서야 스승 집안의 형제들이 백악동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시련을 겪는 과정에서 겸재는 외조부 박자진(朴自振)의 경제적 도움과 스승의 형제이자 그림에도 소질이 있고 많은 서화를 소장하고 있던 노가제 김창업(老家齋 金昌業)의 지도 아래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무렵 겸재는 화론의 모범이었던 송() 곽희(郭熙)의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줄줄 외울 정도였으며, 틈만 나면 눈앞에 펼쳐지는 북악산, 인왕산의 흰 화강암 봉우리와 매일 피어오르는 구름과 안개, 옥류동의 맑은 물소리, 청풍계 골짜기의 시원한 바람 소리까지 몸소 느끼고 이를 화폭에 옮기는 수련을 끊임없이 실천하였다.

겸재의 일생에서 크게 영향을 끼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이다. 사천은 특히 시에 해박하였는데 두 사람은 시와 그림을 서로 바꾸어 보는 시화상간(詩畵相看)의 우정을 한평생 이어 갔다.

하양현감, 청하현감을 거쳐 양천현령으로 부임할 때의 겸재 나이는 65세(1740년)였다. 사천과의 시화상간의 약속에 따라 사천이 시를 보내오면 그 시정(詩情)을 살려 겸재가 그림을 그렸는데 양수리에서 행호(杏浩), 즉 지금의 행주산성까지 주로 한강변의 빼어난 경치 서른세 곳을 화폭에 담았다. 이는 고스란히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이란 화첩에 담겨 있으며 <목멱조돈도>도 이 화첩의 일부이다.

청아한 수묵으로 담아낸 남산의 진경

옛 이름 목멱산(木覓山)인 남산의 주봉에 반쯤 걸친 붉은 태양, 일출이 장관이다. 새벽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고즈넉했던 대지가 은은한 붉은 빛으로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남산 위에 차오른 붉은 기운이 한강의 수면에 쏟아지면서 천지는 태양의 밝은 기운으로 가득히 차오른다.

이른 봄날인 듯 아직 새 잎을 틔우지 못한 강변 수양버들이지만 물오른 가지를 휘휘 늘어뜨린 모습에서 벌써 봄날의 정취를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새벽부터 고기잡이를 나온 양 일엽편주에서 한가로이 노를 젓는 어부와 그와 떨어진 자리에서 불을 피우며 먹거리를 장만하는 남정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우뚝 솟은 남산의 두 봉우리는 붓을 비스듬히 뉘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쿡쿡 찍어내어, 송()대 미불이 창안했다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으로 울창한 숲을 나타내면서 떠오르는 붉은 태양과 대비시킴으로써 음양의 조화를 꾀하는 솜씨가 탁월하다.

강 건너 근경의 얕은 구릉들은 와우산이나 노고산일 법하고 그 옆으로는 애오개 내지는 만리재로 보이는 풍광이 이어진다. 원경의 산은 필시 관악산쯤인 듯한데 일정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붓질로 담아낸 연둣빛 산색이 강변의 금빛 모래톱은 물론 은은한 강상의 물빛 경치와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이렇듯 진경을 그리면서도 정교한 용필과 용묵, 청아한 설채(設彩)에 이르기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도 허용치 않는 겸재의 화폭에서 원숙한 노대가의 손길을 여지없이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겸재 자신도 이 그림을 무척이나 아꼈는지 목멱조돈이란 화제 옆에 천금을 주더라도 남에게 주지 말라는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 새긴 방인(方印)을 큼직하게 날인해 두었다.

겸재는 그림에 대한 타고난 재질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노력하고, 더불어 고전을 온전히 이해한 후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도를 줄기차게 해왔다. 일찍이 전통의 중국 남종화법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것에 깊이 천착하여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진경산수라는 새로운 화풍으로 펼쳐 보였다. 벼슬도 종2품 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으니 화인으로서는 드문 관직 복을 누렸으며, 평생을 가까이해 마지않던 인왕산 자락에서 84세의 일기를 거두었으니 수명 복마저 누린 셈이다.

놀빛 받은 한강의 물결은 오늘도 말없이 금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200~300년 전의 정다운 강변 풍경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로 오늘까지 온전히 전해지며 그 정겨운 조선의 색채와 향훈이 묻어나는 아름다운 회화들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