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와 해학으로
이름난 문장가의
희귀한 그림

연암 박지원의
국죽도(菊竹圖)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이 살았던 17세기 중·후반은 병자호란(1637년)의 참혹한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잦아들고 있었지만 사회 전반에 걸쳐 청에 대한 반감이 여전히 골 깊게 남아 있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연경에 다녀온 지식인들을 필두로 국익과 백성을 위해서는 청의 문물을 배울 것을 과감히 주장하고 나선 이들이 있었으니, 그 중심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의 북학파가 있었다. 연암은 자연과학에서부터 문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연경을 다녀와 정리한 [열하일기]는 당시에 이미 여러 식자들에게 알려져 이를 앞다투어 필사할 정도로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 풍자와 해학이 번뜩이는 [호질], [허생전] 등의 한문 단편소설도 여기에 실려 있다. 이름난 문장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연암에게서 거의 볼 수 없었던 그림 한 점, 즉 [국죽도(菊竹圖)]를 통하여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더듬으며 가을의 정취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writer. 최견 서예가, 한국서화교육원장

고난의 젊은 시절과 늦은 출사

스무 살 남짓 될 때 연암은 남다른 어려움을 겪었다.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인해 한숨도 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극도의 정신 분열 증상까지 보일 정도였으며 이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그를 기피할 정도였다. 연암은 이런 괴로운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길거리 사람들과 어울렸다. 분뇨 장수, 건달, 도사, 이야기꾼 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과 벗이 되어주고 삶에 귀를 기울였다. 이런 이야기를 엮은 것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다.
가세가 기울어진 연암은 32세 무렵 백탑(白塔, 원각사탑) 근처로 거처를 옮겼으며 반상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과 벗하였다. 이곳에서 주로 교유하던 인물은 홍대용을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서상수 등의 유생과 무사 백동수 등이었으며 이들은 백탑파를 형성하고 통음과 풍류는 물론 시사(詩社)와 토론으로 조선의 개혁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나누었다.
연암은 마흔넷(1780년)의 나이에 꿈에 그리던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영조의 사위이자 연암의 삼종형(8촌형)인 박명원이 청 건륭제의 만수절(萬壽節, 고희)을 축하하기 위한 ‘사은 겸 진하사’의 정사(正使)가 된 덕분이었다. 평소 연암의 성품과 재주를 아끼던 박명원은 그를 자제군관으로 데리고 갔다. 사행단의 규모가 250여 명에 이르렀으며 한양~의주~요양~산해관~북경~열하의 머나먼 길이었다. 이때 열하까지 다녀온 이야기와 자신의 생각을 담아 정리한 것이 [열하일기]이다.
연암은 나이 50세(1786년)가 되어서야 음직으로 처음 관직에 나아갔다. 안의현감 때인 정조 17년에는 고문(古文)에 반하는 글쓰기를 금지하는 ‘문체반정(文體反正)’이 실시되었다. 이에 주요 인물로 연암이 지적되고 그의 소설식 문체와 더불어 [열하일기]의 문체가 대표 사례로 지목되었으며 임금은 연암에게 이에 대한 반성문을 올리라는 하교를 내리기도 했다.

명문장가의 담박한 필치

화폭의 좌우에 두 가닥 국화 꽃대가 시원스레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있다. 그 사이에 대나무 가지 하나가 이들을 시샘하듯이 꼿꼿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좌우측 꽃대 모두에 탐스러운 꽃송이가 달려 있어 무르익는 가을의 정취를 넉넉히 느낄 수 있다. 잎의 엽맥이 아직 선명한 것으로 보아 흰 눈이 내리기 전의 절기로 짐작되며 벌과 나비가 정겹게 국화 향을 탐하고 있다.
두 송이 꽃잎은 담묵(淡墨)을 활용한 몰골법(沒骨法)으로 성긴 듯 촘촘한 듯 적절한 밀도를 줌으로써 소담스러움을 유지하고 있다. 꽃대 역시 혜란(蕙蘭)의 줄기를 치듯 담박한 선질(線質)로 서너 번 굴곡을 주면서도 단번에 그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대나무의 형태는 우리 산야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시누대인 듯하고 붓끝을 역입(逆入)하여 중봉(中峰)으로 힘차게 뽑아낸 댓잎은 일체의 거리낌이 없다.
이렇듯 성긴 듯 담박한 붓질 가운데 자그마하지만 극히 정치하게 그린 벌과 나비를 상단에 천연덕스럽게 배치함으로써 전체 화폭에는 소밀(疏密)과 음양(陰陽), 태세(太細)와 근골(筋骨)이 잘 어우러졌다. 전문화인의 그림과 비교해 보아도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름난 문장가 연암의 그림일진대, 형사(形寫)보다는 사의(寫意)에 진의가 있는 것이니 이만한 문인화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림에는 아쉽게도 연암의 낙관이 없다. 다만 그림 좌우에 근대의 국학자이자 한학자인 연민 이가원(淵民 李家源)의 배관기(拜觀記)가 있다.

못다 핀 꿈

연암은 타고난 거구에다 목소리가 매우 컸으며, 기질 또한 남과 쉬이 타협하지 못했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해박한 지식과 명문장가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직인 안의·면천현감, 양양부사를 했지만 중앙의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연암은 67세 무렵부터 몸이 쇠약해져 글을 짓지 못했다. 마침내 가회방(嘉會坊)의 재동(齋洞) 자택에서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만을 남긴 채 숨을 거두었으니 향년 69세였다. 선영이 있는 경기도 장단(長湍)의 송서에 묻혔다.
한적한 초가을의 탑골공원, 푸른 하늘 아래 백탑이라 불리던 원각사 탑이 말없이 서 있다. 시대의 아픔을 예지와 풍자로 달래주던 연암 박지원. 이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가 노닐던 백탑 골목에서 그의 일화를 되새기며 박주(薄酒) 잔을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