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록

고속철도 건설 계획

한국고속철도(Korea High-Speed Rail, KHSR)는 대한민국 교통 정책의 전환을 상징하는 국가 기간교통망 사업이다.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축적된 경제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추진된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특히 인구와 산업이 집중된 경부축(서울~부산)의 교통 포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건설된 고속철도는 국가 경쟁력 강화와 국토 균형 발전이라는 정책적 목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서울역 앞 전경(1976년)

고속철도 구상의 배경과 차량 선정(1970년대~1989년)

6·25전쟁의 상흔을 딛고 일어선 우리나라는 1960~70년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을 이룩하였다. 이에 정부는 새로운 국가 기간망으로서 고속철도 건설을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실로 1983년, 국토개발연구원은 엔지니어링·컨설팅 회사인 루이스 버저, 캠프삭스 및 현대와 협력해 ‘서울~부산축의 장기교통투자 필요성 검토 및 서울~대전 간 고속철도 타당성 연구’ 1단계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이어 2단계 보고서는 1985년에 만들어졌다. 이 보고서에서는 서울~부산 구간에 고속열차 전용 선로를 새롭게 건설하는 방안이 구체화되었다. 1987년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선거공약으로 고속전철사업이 채택되면서 사업은 급물살을 탔고, 공약에 따라 1989년 7월에 ‘고속전철 추진위원회’가 정식 발족하기에 이른다.

1989년 5월에는 건설 기간 7년, 소요자금 3조 5,000억 원(국고 지원) 규모의 서울~부산 간 약 380km의 경부고속철도 건설 추진 방침이 대통령의 재가로 최종 확정되었다. 이어서 1991년 4월 11일 교통개발원이 경부고속철도 구간설계를 확정함에 따라 장래 건설될 고속선로에서 운용할 차량의 구매도 검토되었다. 같은 해 8월에는 차량형식 선정을 위한 제의요청서(RFP)가 주요 고속철도 운영 국가인 프랑스, 독일 및 일본에 공식적으로 공개되었다.

고속철도는 차량, 선로, 전차선, 신호 및 열차제어, 통신 등 여러 하위 시스템(Sub-system)이 유기적으로 결합한 복합 기술의 집약체이다. 기계와 토목은 물론 전기, 전자, 환경공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기술이 요구되기에 당시 정부는 고속철도 구성요소 중 핵심적인 기술이 포함된 차량, 전차선, 열차제어장치 등 주요 시스템은 해외에서 입증된 기술로 도입을 결정하였다. 단순히 기술을 사 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고속철도 핵심기술 분야에 대한 기술제안을 받도록 한 것이다. 아울러 기술이전과 국산화(Technology transfer and localization)를 핵심 조건으로 내걸었다. 장래 도입될 차량에 대한 유지보수요원 훈련과 유지보수 감독도 필요함에 따라 고속철도 시스템의 유지보수 매뉴얼, 교육훈련, 기술 감독(Supervising service)에 대한 대안도 요구하였다. 주요 고속철도 운영 국가인 일본, 프랑스, 독일에는 한국 고속철도시장을 선점할 중요한 기회였다.

1991년 12월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이듬해 3월에는 현재 국가철도공단에 해당하는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이 발족하며 사업은 본궤도에 올랐다. 1992년 1월 말 3개국으로부터 접수된 기술제안서를 마감하였으며, 같은 해 6월 노건일 교통부장관, 김종구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 이사장 재임 중에 천안의 시험선 구간도 착공되었다.

한국고속철도건설공단은 1992년 2월부터 1993년 8월까지 6차례에 걸쳐 수정 기술제안서를 접수하여 선정된 전문가들과 함께 심층적인 기술평가를 진행하였다. 평가의 핵심 사항은 시속 300km 속도로 운행될 고속차량시스템의 기술 우수성과 안전성이었다. 향후 독자적인 차량 제작과 수출까지 염두에 둔 기술이전, 국산화, 경제성에도 큰 비중을 두었다.

경부고속철도기공식(1992년)

이에 따라 해외 철도차량 제작사는 국산화와 기술이전을 염두에 두고 국내 차량 제작사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어야 했다. 당시 국내 철도차량 시장을 점유하던 민간 3사는 각자의 강점을 바탕으로 글로벌 파트너를 선택하며 주도권 경쟁에 나섰다. 대우중공업㈜은 전동차, 전기기관차 국산화 경험 보유와 철도차량 연구개발 능력도 상대적으로 뛰어났다. 대우는 전기차량 추진제어 기술이 우수한 독일의 지멘스(Siemens)사를 협력사로 삼았다. 국내 현대자동차 그룹을 기반으로 성장 중인 현대정공㈜은 프랑스의 알스톰(GEC-Alstom)사를 택하였다. 또한, 조선 산업에 주력하며 철도차량제작 후발주자인 ㈜한진중공업은 전동차 국산화에서 일본 도시바사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일본 미쓰비시(Mitsubishi) 등 일본철도차량그룹을 파트너로 관계를 구축하였다. 당시 국내 3사는 인버터형 전동차 수주 경쟁 과열로 재무 구조가 악화되어 통합 논의가 오가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고속차량 수주는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은 물론, 기술력 향상으로 단숨에 글로벌 제작사로 변신할 기회였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다.

일본철도의 신칸센은 높은 정시율과 안전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승강장도 고상홈을 사용하여 통근용 전동차처럼 여객 승하차가 편리하고, 편성당 좌석 수도 많아 대량 수송이 유리하였다. 그러나 신칸센의 영업 최고 속도가 대부분 270km/h 이하였다. 이는 바퀴와 레일 사이의 마찰력이 부족해 미끄러질 상황까지 대비하여 열차를 상대적으로 낮은 속도로 운행하였기 때문인데, 300km/h 이상의 입증된 기술을 도입하려는 국내 기술자들에게 기술적 확신을 줄 수 없었다. 한국의 고속철도가 개통된 이후에서야 일본은 300km/h 속도의 고속열차를 운행하였다.

독일의 고속열차 ICE는 전기철도의 선두주자인 지멘스(Siemens)사를 필두로 첨단 기술력을 과시하였다. 1988년 5월 독일철도는 ICE/V 고속시험차량으로 시속 406.9km의 세계 고속차량의 속도 기록을 세웠다. 최신 반도체 기술을 적용한 교류 유도 전동기 방식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독일은 엄격한 산업 규격(DIN)을 통해 기술 유출을 철저히 방지하고 있었고, 고가 정책과 소극적인 기술이전 태도를 고수하였다. 소재 산업 기반이 약했던 당시 우리나라로서는 기술을 이전받더라도 실질적인 국산화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반면, 1970년대 산업선에 철도청 전기기관차를 납품하였던 프랑스 알스톰은 한국 전기철도에 대한 경험이 많아 제안서 작성에도 상대적으로 유리하였다. 알스톰사는 테제베(TGV) 고속차량의 최고속도 기록과 관절대차(Articulated bogie 혹은 Jacob’s bogie: 열차의 차량과 차량 사이에 대차를 설치하여 마치 차량 간에 관절과 같은 역할을 하도록 전체 열차가 묶여 있는 구조의 대차)의 장점을 강조하였다. 특히 테제베 차량은 탈선 시에도 차량이 전복되지 않아 안전하다는 점을 내세웠다. 오랜 운용 경험, 기술의 우수성은 물론, 우리가 절실히 원했던 전반적인 기술이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결국 고속철도 차량은 경제성과 기술 자립 가능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프랑스의 테제베가 최종 기종으로 낙찰되었다.

국내에서 조립, 생산한 최초의 고속철도 차량인 KTX

건설 단계와 기술 국산화의 진전(1995년~2001년)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며 노반·교량·터널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서울에서 부산에 이르는 총연장 약 412km의 경부고속철도는 국토의 70% 이상이 산지인 지형 특성상 대규모 터널과 교량이 필수적인 고난도 토목 공사였다. 특히 금정터널과 같은 장대터널 건설은 국내 철도 기술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와 동시에 차량 제작에서도 비약적인 발전이 있었다. 초도 편성은 프랑스에서 제작되었으나, 이후 물량은 기술이전 계약에 따라 국내 업체에서 조립 및 생산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고속철도 차량의 설계·제작 기술이 국내에 축적되었으며, 향후 국산 고속열차 개발의 기반이 되었다. 또한 선로는 기존선과 분리된 전용 고속선으로 건설되었으며, 25kV 교류 전철화 시스템과 TVM 신호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는 기존 재래선 중심의 철도 운영체계와 질적으로 다른 고속·대량 수송 체계로의 대전환을 의미하였다.

사목터널(2001년)

조직 개편과 개통 준비(2002년~2004년 이전)

2000년대 초반, 건설 공정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며 시험운행과 운영 준비가 본격화되었다. 2003년 한국철도청은 공기업 체제로의 전환을 준비하며 운영 조직을 정비하였고, 이와 동시에 전문 인력 교육이 병행되었다. 마침내 2004년 4월 1일, 고속철도(KTX)는 경부선(서울~부산) 및 호남선(용산~목포) 구간에서 상업 운행을 개시하였다. 이는 20여 년에 걸친 정책 구상과 10여 년의 건설 과정을 거친 결과였다. 개통 이전 단계에서 이미 최고 시속 300km에 근접한 시험 운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KTX는 국내 철도 기술과 운영 역량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2004년 이전까지의 한국고속철도 연혁은 단순한 교통수단 도입의 역사를 넘어, 국가 발전 전략과 기술 자립을 향한 장기적 정책 선택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1970년대 후반의 구상 단계에서 1990년대 기술 도입과 건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의 개통 준비에 이르기까지, 한국고속철도는 경제 성장, 국토 구조 변화, 기술 축적이라는 복합적 요인 속에서 추진되었다. 특히 외국 기술 도입을 기반으로 하되 점진적 국산화를 추구한 전략은 이후 한국형 고속철도 기술 개발과 해외 진출의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2004년 이전의 한국고속철도사는 교통사뿐 아니라 산업사·기술사적 관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경부고속철도 1단계 계통식(2004년)

고속철도의 성과

한국 고속철도 건설은 단순한 교통수단 확충이 아니라 국가 공간구조를 재편하고 미래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핵심 전략사업이었다. 정부는 계획 단계에서 200km/h급 준고속철도(안)도 검토하였지만, 단기 수요 대응보다 장기적인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최고속도 300km/h급 고속철도를 선택하였다. 이는 국가 발전 방향을 미래지향적으로 설정한 중요한 결단이었다.

당시 기대된 핵심 성과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첫째, 서울~부산 축을 중심으로 전국을 사실상 단일 생활권으로 묶고, 철도축을 따라 도시 발전을 유도해 국가 공간구조를 재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KTX는 항공 수요를 상당 부분 대체하며 장거리 이동의 대표 수단이 되었다. 둘째, 고속선과 기존선을 직결하는 통합 네트워크를 구축해 환승 없는 이동체계를 구축하고, 고속철도의 효과를 중소도시까지 확산하고자 하였다. 셋째, 서울~천안 등 수도권 남부 구간에서는 광역 통근·통학 기능을 수행해 일상 이동 구조 변화도 기대되었다. 넷째, 철도 분담률을 높여 도로 혼잡과 탄소배출을 줄이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환경적 효과를 목표로 삼았다. 다섯째, 차량·신호·전력 시스템 국산화를 통해 철도 기술 자립 기반을 구축하려는 전략이었다.

이 사업의 출발점에는 1989년 고속철도기본계획을 확정한 전 교통부장관 김창근의 결단이 있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고속철도를 운영하던 나라는 일본과 프랑스뿐이었고, 한국의 경제 규모와 재정 여건을 고려하면 사업비 부담도 매우 컸다. 그럼에도 그는 고속철도를 단순한 교통사업이 아니라 선진국 진입과 통일 이후 대륙철도까지 내다본 국가 미래 전략으로 인식하였다. 이후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 김세호 전 차관, 김한영 전 국가철도공단 이사장, 차동득 전 교통연구원 부원장 등도 사업 추진과 개통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한국형 고속철도는 항공 대체, 통근 수요 흡수, 높은 인구 커버율, 기술 자립 기반 형성 등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 1899년 경인선 이후 이어진 철도 발전의 흐름 속에서 1989년 기본계획 확정과 2004년 개통은 한국 철도의 르네상스를 연 전환점이었다.

고속철도는 우리나라 철도 르네상스의 도래를 이끌었고, 지역발전과 성장을 뒷받침하는 교통인프라로서 자리매김하여 국민의 이동 편리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이러한 고속철도의 사회경제적인 효과를 통하여 교통선진국으로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KTX 개통 당일 새벽의 서울역(2004년 4월 1일)